참으로 오랜만에 쓰는 리뷰다.
왠만큼 1달에 1-3편 많으면 4편까지 나름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중 한명으로 그 동안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마찬가지로 매우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 경우는 왜 그래서인지 손이 근질거린다 무척이나..;]

만약 당신이 '유령작가'를 선택했다면 한번쯤은 봐둬서 괜찮을 법한 칼럼를 아래에 옮긴다.- 주의 !당신이 아는 사실에 대한 의미 없이 재생산된 '펌글'이 될 수 도 있다.-
통해서 조금 더 폴란스키 감독에 한걸음 다가가 그가 무엇을 그의 영화에 담고 이야기 하는지 분명히 말하지만 선택, 혹은 결정을 봤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길지는 않은 영화잡지 칼럼은 폴란스키 감독의 과거와 현재를 심플하게 증언하고, 사실을 통해 이번 '유령작가'를 보기 전 알아두면 득이 되길 바란다.
폴란스키 감독의 굵직한 사건을 골자로 한 아래에 글은 MBC의 '서프라이즈'에서도 나왔듯 실로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거장의 배경은 그의 영화들만큼 드라마틱하다.


§ § § §



로만 폴란스키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로 들어가면 파란만장이라는 수식어가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을 정도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다. 예컨대, 지난해 9월 로만 폴란스키는 취리히영화제 공로상 수상을 위해 스위스에 입국 도중 긴급 체포당했다. 1977년 미국에서 13살 소녀를 강간한 혐의였다. 영화감독으로써 그의 삶이 예술가의 모범을 보여준다면 생활인으로써의 로만 폴란스키는 탕아에 가깝다. 그렇다고 예술가와 생활인의 삶을 분리해서 평가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로만 폴란스키의 경우, 이 둘을 떨어뜨려 평가하기 힘들 만큼 영화 작업과 사생활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존경받는 예술가인가, 천하의 난봉꾼인가.


조국에서 탈출하다

장편 데뷔작 <물속의 칼>(1962)은 로만 폴란스키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린 영화다. 중년 부부의 삶에 불쑥 뛰어 들어온 젊은이에 의해 와해되는 부부 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좁은 보트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충돌을 통해 미세한 심리를 포착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폴란드 정부는 <물속의 칼>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폴란드인의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전 세계에 부정적인 인상을 퍼뜨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회로부터 고발당한 폴란스키는 이를 반성 삼아 앞으로는 조국의 이미지에 해가 되는 영화는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농담이다. 실제로 그는 <피아니스트>(2002)를 만들기까지 오랫동안 폴란드 배경의 영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것은 폴란드 의회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예술의 자유를 구속하는 지긋지긋한 조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폴란드에서의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1933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두 살 때 폴란드로 돌아왔지만 그해 세계2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폴란스키의 인생은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폴란드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폴란스키는 부모와 함께 유대인 집단수용소에 억류되어 여덟 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아버지와 함께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폴란드와 독일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폴란드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생존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폴란드 작가 블라디슬로프 스필만 원작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연출했다.) 여기서 폴란스키는 생전 처음으로 영화를 접하게 되는데 애국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폴란드인들이 금기시하는 독일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종전 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로츠(Lodz)에 있는 영화 학교에 입학해 5년간 수학했다.

후에 밝힌 인터뷰를 보면 폴란스키는 “가진 돈이 없었기에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기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연출에 앞서 19살 때인 1954년 안제이 바이다의 <제너레이션>(1955)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건 이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가 생존의 의미와 동일했던 폴란스키는 로츠의 영화 학교에서 귀중한 배움의 시간을 갖으면서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폴란드를 떠날 궁리만 했다. 그는 폴란드를 탈출한 후 한 인터뷰에서 “조국에서 살았던 25년 동안 환멸을 느꼈다. 나는 항상 정치적으로 안정된 곳에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시 폴란드의 젊은 세대라면 모두 꿈꾸는 것이기도 했다. “맞다. 우리는 모두 서방에서의 삶을 꿈꿨다. 나는 매일 밤마다 페달 달린 잠수함을 타고 폴란드를 탈출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다만 그들은 꿈만 꿨지만 나는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이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유럽을 떠돌려 영화를 만드는 운명이 될지.


살인마 맨슨 추종자에게 부인을 잃다

영국 런던에서 제2의 삶을 살며 자유를 만끽하게 된 폴란스키는 보다 안정적인 시스템 하에서 <혐오>(1965) <로만 폴란스키의 궁지 Cul-de-sac>와 같은 중요한 작품을 만든다. 특히 반복된 삶과 외로움으로 무너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다룬 <혐오>로 할리우드행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아파트처럼 일상적인 공간을 환각의 지옥도로 묘사한 표현주의적 면모가 당시에는 획기적일 만큼 독창적이었던 것.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악마의 씨>(1968)는 <혐오>에서 보여줬던 좁은 공간에서의 촬영은 물론 이야기적으로도 개인의 강박관념을 더욱 극대화하며 그의 작품 중 가장 최고로 평가받는다.

<악마의 씨>는 개인의 악마성이 ‘씨’가 되어 세상에 폭력과 악을 퍼뜨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악마의 씨>를 인상 깊게 본 찰스 맨슨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범행을 지시,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69년 8월 폴란스키가 부재한 틈을 타 4명의 ‘악마’가 집에 침입하여 당시 임신 8개월이던 부인 샤론 테이트의 배를 난자해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두 번째 아내인 샤론 테이트는 <악마의 씨>에 앞서 작업한 <박쥐성의 무도회>(1967)에서 만나 결혼한 사이였다. (첫 번째 부인 바바라 레스 역시 폴란드의 여배우로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 1959년 부부 사이가 됐다. 하지만 3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고 그녀 역시 폴란드를 탈출해 배우 생활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촉망받는 여배우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론 테이트 사건은 당대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로만 폴란스키는 아직도 평생에 가장 후회하는 일로 샤론 테이트를 집에 남겨두고 외출한 일을 꼽는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폴란스키는 사건 이후 할리우드를 떠나 영국에서 절치부심했다. 그때 만든 영화가 바로 문제적 영화로 평가받는 <맥베드>(1971)다. 셰익스피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피에 굶주린 맥베스가 등장하는 것은 폴란스키의 당시 심정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다만 영화 속 살인 장면을 샤론 테이트의 살해 과정과 너무나도 흡사하게 재연함으로써 주변 사람은 물론 팬들까지 경악시킨 일화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한편으로 <맥베드>는 폴란스키가 연출한 최초의 고전 문학 원작의 작품이었다. 8년 후 그는 토마스 하디의 1891년 소설 <더버빌 가의 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를 원작으로 한 <테스>(1979)를 만들어 대표작에 올려놓았다.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에 상관없이 <테스>는 그의 평생 가장 각별한 영화로 남아있는데 이는 살아생전 샤론 테이트와의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던 까닭이다. 문제의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 샤론 테이트는 폴란스키에게 <더버빌 가의 테스> 카피 본을 선물하면서 함께 작업하자고 약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폴란스키는 샤론 테이트를 떠올리며 테스 역에 당시 떠오르는 신예였던 나스타샤 킨스키를 캐스팅해 부부 간의 약속을 지키고야 말았다. 


13세 소녀를 강간(?)하다

큰 짐을 덜었던 탓일까. 샤론 테이트의 죽음 이후 싱글로 지내던 폴란스키는 <해리슨 포드의 실종자 Frantic>(1988)에서 (역시!) 자신 발탁한 여배우 엠마뉴엘 세이너를 만나 1989년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현재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는데 이들 부부가 두 번째로 함께한 영화 <비터문>(1992)은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불쾌한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터문>은 망망대해를 유람하는 크루즈호가 배경으로, 두 쌍의 부부를 통해 부부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휴 그랜트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젊은 날을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결혼 7년차를 맞이한 나이젤(휴 그랜트)과 피요나(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 부부가 비정상적인 욕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오스카(피터 코요테)와 미미(엠마뉴엘 세이너) 커플을 통해 잠자고 있던 성적 욕구를 다시 일으킨다는 내용이 <비터문>의 주를 이룬다. 여기서 엠마뉴엘 세이너는 탈출구 없는 부부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으로 인해 비극적 말로를 맞는 미미를 연기했다. 호사가들은 이런 영화의 결말을 두고 로만 폴란스키를 비아냥거렸다. 앳된 용모의 엠마뉴엘 세이너를 캐스팅해 13세 소녀 강간 사건에 대해 영화적 반성을 시도한다며 공격했던 것이다.

폴란스키와 13세 소녀와의 사건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차이나타운>(1974) 이후 절친한 관계를 맺은 잭 니콜슨의 집에서 당시 13세이던 소녀 모델 사만다 가이머를 만났다. 폴란스키는 그녀에게 샴페인과 수면제를 먹이고 영화 테스트용이라며 나체 사진을 찍은 후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잭 니콜슨에게도 공범 혐의가 의심됐다. 하지만 잭 니콜슨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폴란스키는 성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성폭행은 아니었다며 불구속상태에서 프랑스로 도피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30년 동안 유럽 각국을 돌며 영화를 찍는 노마드(Nomad) 신세가 됐다. <비터문>을 향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대해서 폴란스키는 “나는 불의로부터 도주한 것”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그는 사건 32년 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고야 만다.


32년 만에 발목 잡힌 성추행 사건

2010년 2월 21일 독일 베를린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 모인 기자들은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자 이름이 발표되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령 작가>의 로만 폴란스키 이름이 호명됐지만 단상에는 프로듀서인 알랭 사드가 올라왔다. 상을 수상한 그가 폴란스키 대신 수상 소감을 전하자 객석은 이내 조용해졌다. “폴란스키 감독님은 제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느 영화제에 상을 수상하러 갔다가 평생을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다. 그러니 베를린에 갈 수 있었어도 나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2003년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에 이름을 올리고도 미국에 입국할 수가 없어 해리슨 포드가 대리 수상한 이래 두 번째로 겪는 비참한 경험이었다.

<유령 작가>는 베를린영화제 개막부터 폐막까지 연일 화제에 오른 작품이었다. 물론 영화도 훌륭했지만 (아래 Tip! 참조) 무엇보다 극중 섬에 갇힌 대필 작가와 폴란스키의 처지가 겹쳤던 까닭에 황색 저널리스트들은 연일 입방아를 찧어댔다. <유령 작가>의 영화사는 그의 체포와 관련한 발언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지만 피어스 브로스넌은 “필름도 깡통 속에 담겼고 감독도 깡통(가택연금) 속에 감금됐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피어스 브로스넌처럼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알렌, 왕가위, 데이빗 린치, 틸다 스윈튼,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 전 세계 영화인들은 폴란스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고 (과거 그의 영화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폴란드 정부는 힐러리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석방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피해자 사만다 가이머는 잊고 싶은 경험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 괴롭다며 2010년 1월 미국 LA 사법 당국에 폴란스키의 기소 철회를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로만 폴란스키는 스위스 법정에 420만 달러, 우리 돈 45억여 원의 보석금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현재는 전자 감시 장치를 몸에 부착한 채 한때 자신의 스위스 별장이었던 곳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있다. <유령 작가>의 포스트 프로덕션 도중 체포되었던 폴란스키는 가택 상태에서 후반 작업에 들어가 영화를 완성했다. 현재 스위스는 폴란스키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요청에 대한 판결을 지금까지 미루고 있는 상태다. 앞으로 폴란스키의 행보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존경받는 예술가와 천하의 난봉꾼 사이에서 그를 규정하려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 § § §



이쯤하면 필자는 거장의 역작을 찬사하고, 영화를 보고난 후 몇일을 끌려다니는 부류일까?
아니면 지루하고 매력없고 아쉬움이 그득한 망작이라고 토로하는 부류일까?
여기까지 착실히 따라온 당신이라면 영화를 보고도 후자에 해당된다면 이 모든 것은 공허한 휘젓기고, 삽질이다. 어느 쪽이겠는가? 단연코 장담하지 말아야하는 영화로 필자에게 남는다.
영화 속 영국의 총리는 '노동당'으로 그려지는데 이에 상식 또한 덧붙여진다면 이해가 쉽겠다.

*노동당(勞動黨, Labour Party)
영국의 주력 중도 좌파 정당 이자 세계 거대 정당 중 하나이며 원내 제2당이다.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당이라고 하나 정책은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 국제사회주의의 회원이며, 토니 블레어의 지도 아래 1997년 총선에서 대승을 이루었다. 이후 2001년과 2005년 총선에서 더 크나큰 승리를 거두며 권력을 유지했지만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에게 패배하여 원내 제2당의 자리에 있다.

현실적 정치설정의 시선은 매우 깊이 와닿았다.
이 점에서 앞서 개봉한 '그린존'과의 연장선에서 매우 흡사한 면도 있다고 보고, 확실한 차별된 시선 또한 볼 수 있겠다.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한 정치필드의 음모론이 공통주제라면 방법론적, 시각적, 국가적 입장 등 에서는 많은 차별화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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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베를린영화제, 스릴러/미스테리, 유령작가, 이완 맥그리거, 피어스 브로스넌
2010.06.12 15:59 Trackback 1 Comment 2
 



;; 대선 출마 연설..
역사는 당신의 삶이 끝났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그 끝이 시작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시민, 각성된 지각을 가진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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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연설
2010.06.08 00:58 Trackback 0 Comment 0


마키아벨리의 문제


르네상스는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서양미술사의 두 명의 천재,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조각과 회화에서 미술의 본령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그 자취를 남긴 도시이다. 이들을 지원했고 동시에 피렌체의 지배 가문이었던 메디치가가 집정하던 건물 우피치(영어:Office)는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우피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조그마한 도시인 피렌체에는 발길 가는 곳마다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피렌체가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 도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사상에서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역시 메디치가와 굴곡 많은 관계를 맺으면서 서구 사상사에 전무후무한 하드보일드 정치공학 필독서 [군주론]을 남겼다.


사람들을 잘 대우하던지 아니면 아예 철저하게 망가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상처를 입으면 복수를 할 있지만, 극심한 상처를 받으면 복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복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혹독해야 한다.

- [군주론] 3장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론]은 명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쓰여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1513년에 쓰여지고 마키아벨리의 사후에 출판된 이 책에 대해서는 극과 극으로 다른 해석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서양 사상사에 이름을 남긴 철학자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샤 벌린(Isaiah Berlin)의 뛰어난 에세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질문]에 소개된 기존의 해석들 중 몇몇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폭군정치에 대한 경고로서 일종의 풍자로 해석했다. 피히테는 실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성찰하면서 기독교적 윤리를 공격하기 위한 반(反)그리스도교적인 문헌으로 해석했으며, 그와 다르게 마키아벨리를 기독교도로 간주한 학자도 있다. 크로체는 정치 영역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악’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시한 ‘분노한 휴머니스트’로 간주했으며, 반면 스위스의 몇몇 해석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휴머니스트’로 간주했다. 카시러는 마키아벨리를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차가운 정치 공학자로, 헤겔은 몇몇 지엽적 원칙을 넘어서서 혼돈에 빠지기 쉬운 사회의 요소들을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려던 천재로 보았다. 베이컨에게 마키아벨리는 이상 사회에 대한 환상을 버린 ‘울트라 현실주의’였고,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꿈꾸던 마르크스, 엥겔스에게는 ‘쁘띠 부르조아지’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계몽주의의 거목’이었다.

일반인들에게 마키아벨리즘이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말로 요약되지만, 서양의 철학자들이 짧고 명확하게 쓰인 [군주론]에 대해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해석들을 내놓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와의 충돌

사회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 사이의 상이함



서양사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행위 규범은 기독교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설사 기독교 윤리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하나만을 따르더라도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마키아벨리를 읽는 독자들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행위규범들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경우엔 규범을 받아들이기 이전 규범의 정당성을 질문하고, 이때 서로 충돌하는 규범들을 통일적으로, 혹은 여러 단계를 설정하여 혹은 여러 영역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사랑의 대상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어떤 쪽이 더 바람직할까? 어쩌면 우리는 양자 모두가 바람직하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과 공포는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만일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받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 [군주론] 3장

‘마키아벨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정치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다. 마치 뛰어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목적인 예술가들이 상식적 도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듯이, 번영하는 강한 국가를 창조하는 것이 목적인 정치가들 역시 상식적 도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정치와 도덕은 서로 독립적인 두 개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정치공학적 주장이나 기독교의 가르침 모두 ‘~해야 한다’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행위 규범들이다. 여기서 혹자는 윤리적 규범은 내면의 명령이고,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작전술’로 간주하여 양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논쟁은 윤리적 원칙이 ‘조건적인 목적 지향성’에 있는지(공리주의) 아니면 칸트식의 ‘무조건적 도덕성’(근본주의)에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근본주의로 해결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특히 정치의 목적이 번영하는 국가와 국민의 복리증진에 있다면, 이러한 목적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감과 결부된 통치행위 규범을 윤리와 무관하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샤 벌린이 정확히 지적하였듯이,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기독교 윤리의 충돌은 윤리들간의 충돌인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적 ‘사회의 윤리’와 기독교의 혹은 상식적인 ‘개인의 윤리’가 서로 상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떤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여러 개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상쟁(相爭)하던 조국 이탈리아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냉정한 현실주의자, 혹은 ‘국가이성(raison d'État, Staatsraison)’을 개인의 윤리보다 우선시한 근대적 정치 사상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겔은 이 점을 역사일반의 차원으로 높여 생각했다. “역사의 진행은 덕(德), 악(惡) 그리고 정의(正義) 밖에 서 있다.” 물론 여기서 ‘덕’, ‘악’, ‘정의’란 사회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의 이야기다. 그러나 사회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 사이에 놓여 있다고 보이는 깊은 심연(深淵)은 사회의 구성원이 개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개인 역시 근본적으로 사회 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생각만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는 않다.

즉, 윤리란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만큼 크던 작던 항상 사회의 존재를 전제한다. 차라리 우리는 이미 세워진 사회 속의 개인(일반 시민)의 행동방식과 사회를 처음으로 세우고 유지하려는 개인(군주)의 행동방식의 차이를 성찰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공화국을 만들고 법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든 사람은 악하며, 기회만 있으면 항상 악한 마음을 사용 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인간은 필요하지 않으면 결코 선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혼돈과 혼란이 만연하게 된다. 

– [로마사 논고] 1권 3장


마키아벨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심에 가득 찬 개인들이다. 때때로 선한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며, 긴 시간을 두고 볼 때 인간의 마음은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특히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가들이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권력욕 없이 권력을 추구한다’는 주장처럼 자기모순을 의미할 뿐이다. 아마도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는 한 사회를 누가 어떻게 설계해야만 하느냐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고 본 것 같다. 바꿔 말해 특정한 군주가 특정한 정치체제를 선택해야만 하는 필연성은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군주는 항상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때 결정은 합리적 대화가 아니라 힘과 권력의 무자비한 사용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처럼 선택의 여지를 없애야 그가 세운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수학적 공리체계에서 공리 자체는 더 이상 증명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자명성(自明性)을 전제했던 것과 흡사하다. 나의 군주가 이런 정치체제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하게 즉 당연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이성이 개인의 윤리보다 우선하는가?

군주는 정치체제 선택을 위해 폭력을 써야하는가?


일반사회보다는 정치권에서 마키아벨리즘이 더 일상적이라는 사실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합리적 대화가 아니라 힘에 의해 권력구조가 결정된다는 것, 즉 “나는 너에게 복종을 요구해도 너는 나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없다”는 권력 원칙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비대칭성’에 있다. 다른 한편, 모든 사회의 일반 구성원들 사이에 통용되는 기본적 윤리의 가장 큰 특징은 항상 ‘대칭성’에 있다.

‘비대칭성’은 구교나 개신교의 십계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십계명 중 앞의 세 개 혹은 네 개의 계율은 다른 종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믿음의 정초에 해당하므로 비대칭적 계율이다. 즉, 다른 종교에서도 자신의 종교만을 믿을 것을 요구할 때 그 선택에 합리적 대화가 존재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 나머지 계율인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은 대칭적이며, 이 계율의 정당성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당연히 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거짓말이 횡행하는 사회는 유지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거짓말 금지’는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대칭적 윤리규범이다.

이쯤해서 과거 동북아시아에 통치이념을 제공했던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마키아벨리의 정치공학을 비교해보는 것도 ‘마키아벨리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유가는 모든 인간이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네 개의 단서(四端)를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으며 그런 점에서 누구나 선(善)한 본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다만 구름이 해를 가리듯, 인간의 욕심이 이 선한 본성을 가려서 사회의 혼란이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통치의 기본도 백성으로 하여금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모든 왕조는 대규모 폭력을 통해서 수립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가의 전통적 윤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이미 세워진 정치체제 안에서의 윤리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공학이 결코 서양의 폭군정치를 합리화하는 데에만 국한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현대 사회의 구석구석에서도 마키아벨리즘은 크던 작던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체제를 처음 세울 때 마키아벨리즘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체제의 기초에 불가피하다고 보이는 자의성은 설사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더라도 다른 체제로의 대체가능성으로 인해, 또 자의성 자체가 정당성의 반대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제수립과 관련한 ‘마키아벨리의 문제’를 그 어떤 종류의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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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22:56 Trackback 0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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